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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바보였을까

출근만담 2일차. 유튜브에서 본 판결 하나에 걸려서 형벌의 목적과 비가역성까지 굴러갔고, 그러다 갑자기 외계인 얘기로 넘어갔다.

#Thoughts#Daily#System#Cognition

계기

오늘도 MRT 타고 출근하면서 재밌는 만담들이 오갔다. (재미를 위한 약간의 각색이 있습니다)

시작은 유튜브 영상 하나였다. 미국에서 명예살인이 있었고, 살인 의도가 없었다는 이유로 형이 생각보다 약하게 나왔다는 내용.

고윰윰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쯧쯧, 미국 가서 그러다니. 그리고 살인 의도가 없어? 말세야 말세."

미리 하나 박아두고 시작한다. 이 글은 그 사건의 가해자를 변호하는 글이 아니다. 그리고 그 영상이 사실인지도 나는 모른다. 우리가 본 건 알고리즘이 물어다 준 몇 분짜리 클립 하나고, 판결문을 읽은 게 아니다. (사건 자체가 팩트체크 필요)

내가 걸린 건 사건이 아니라, 정보가 이만큼밖에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판단을 끝내버린 속도 쪽이었다.


1. 인터넷에 보이는 정보만 믿는 건 위험하다

그래서 처음에 던진 건 이거였다.

"살인 의도가 진짜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아?"

의도라는 건 사람 머릿속에 있는 거다. 법정에서도 그걸 직접 관측하지 못한다. 정황과 증거로 역산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역산 과정을 하나도 안 보고, 역산 결과를 요약한 기사 제목만 봤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 영상 제목에 '무슬림'이 박혀 있었다는 것. 라벨이 붙는 순간 판단이 미리 닫힌다. 이건 저번에 '망국병'이라는 단어 때문에 논의가 닫히던 거랑 같은 패턴이다. 단어가 결론을 미리 실어 나른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그럼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자는 거냐"가 되는데, 그건 아니다. 판단은 하되 확신의 강도를 정보의 양에 맞추자는 쪽에 가깝다.


2. 형벌은 대체 뭘 하려는 건데

여기서 각도를 바꿨다. 판결이 이상하다고 느끼려면, 먼저 판결이 뭘 하려는 건지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

형벌의 목적은 크게 두 갈래로 본다. 교화징벌.

내가 이 두 개를 꺼내자마자 답이 왔다.

"징벌!!!!!!"

느낌표 여섯 개였다. 그리고 사실 나도 같은 쪽이다. 형벌의 주된 목적은 징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교화 얘기부터 꺼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근데 법조인들은 이걸 좀 다르게 본다고 들었다. 그래서 왜 다르게 보는지를 한번 따라가봤다. 여기서부터가 재밌었다.


3. 우리는 신이 아니고, 판사도 마찬가지다

징벌이 성립하려면 전제가 하나 필요하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나쁜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

근데 우리는 신이 아니다. 초지능 인공지능도 아니다. 그리고 판사도 마찬가지다. 판사는 법복 입은 인간이지 진실 판독기가 아니다.

문제는 형벌 쪽이 다루는 물건이다. 사형이나 장기 금고형은 비가역적이다. 되돌릴 수 없다. 잃은 시간은 안 돌아오고, 집행된 사형은 정정이 안 된다.

정리하면 이런 구조다.

  • 되돌릴 수 없는 처분을
  • 불완전한 인간이 구형하고
  • 불완전한 인간이 판단한다

이러면 판사 입장에서 계산이 달라진다. 징벌에 무게를 실으면 틀렸을 때 복구가 안 된다. 교화 쪽에 무게를 실으면 최소한 나중에 조정할 여지가 남는다. 그러니까 교화 쪽으로 기우는 건 판사가 물러터져서가 아니라, 틀릴 확률을 계산에 넣으면 그쪽이 편해서에 가깝다고 본다.

이건 도덕 얘기가 아니라 리스크 관리 얘기다.

여기까지 따라와도 내 감은 여전히 징벌 쪽이다. 근데 저쪽이 왜 다르게 보는지는 알겠더라. 감정으로 보면 징벌이고, 시스템 설계로 보면 교화다. 둘이 싸우는 게 아니라 보는 층이 다른 것 같다.

그리고 쓰다 보니 어제랑 같은 단어가 또 나왔다. 어제는 서사가 성립하는 조건으로 비가역성을 얘기했는데, 오늘은 형벌의 성격으로 비가역성이 나왔다. 롤백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굴어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내 기본 렌즈인 것 같다.


4. 근데 미국은 원래 세게 나오지 않나

여기서 반대 방향도 봐야 한다. 미국은 형량이 원래 빡세기로 유명한 동네다.

이유 중 하나가 죄목을 합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나라식으로 여러 죄를 묶어서 하나의 형을 정하는 게 아니라, 죄목별로 따로 구형해서 쌓는다. 그래서 징역 200년 같은 숫자가 나온다. (구조는 이렇게 알고 있는데 세부는 주마다 다를 거다 — 팩트체크 필요)

그런 동네에서 형이 약하게 나왔다는 건, 오히려 증거가 생각만큼 안 나왔다는 신호일 수 있다. 증거가 확실했으면 거기서는 더 세게 갔을 거다. 그게 그 시스템의 기본 성향이니까.

여기서 사고실험을 하나 던졌다.

샷건 들고 와서 딸을 쐈다. 그래도 같은 판결이 나왔을까?

안 나온다고 본다. 그럼 뭐가 다른가. 행위의 도구가 다르고, 도구가 다르면 의도의 역산 결과가 달라진다. 즉 판결을 가른 건 관용이 아니라 증거의 모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5.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바보였을까

오늘 제일 재밌었던 질문이 이거다.

판결이 이상하다고 말하려면, 그 판결을 만든 판사와 배심원단이 나보다 멍청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근데 그 사람들은 법정에서 며칠 동안 증언을 들었다. 나는 유튜브 클립 하나를 봤다.

정보량이 압도적으로 저쪽이 많다. 그런데 판단은 이쪽이 더 빨랐다.

물론 배심원단이 틀릴 수도 있다. 실제로 틀린 사례도 많다. 근데 "틀릴 수 있다"랑 "내가 더 잘 안다"는 다른 문장이다. 나는 앞 문장까지만 말할 수 있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판단을 일단 존중해보고, 거기서 거꾸로 사건을 재구성해봤다.

중매결혼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겁을 주려고 목을 졸랐는데 딸이 죽었다.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면 약한 판결이 설명된다.

이건 가설이다. 나는 그 사건을 모른다.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판사가 바보였다"보다는 이쪽 가설이 관측된 결과를 더 적은 가정으로 설명한다는 것 정도가 내 얘기다.

그리고 이 가설이 맞다고 해도 딸은 죽었다. 그건 안 바뀐다.

여기까지 듣고 나온 반응.

"고랭"


6. 그러다 갑자기 외계인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화제가 훅 튀었다.

"외계인은 있어! 너도 믿니?"

나는 믿는다. 우주는 사실상 무한에 가깝게 넓고, 그 안에서 생명이 발생할 확률이 0이 아니라면, 곱셈 결과는 거의 확실하게 1에 붙는다. 확률만 놓고 보면 안 믿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주장이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 "외계인 믿냐"는 질문이 사실 하나의 질문이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단계를 나눠봤다.

1단계 — 확률상 존재한다 우주 어딘가에 생명체와 문명이 있다. 다만 서로 만난 적은 없다. 나는 여기다.

2단계 — 가끔 찾아온다 UFO가 와서 우리를 슬쩍 염탐하고 간다. 접촉은 있지만 공식적이지 않다.

3단계 — 이미 섞여 산다 맨인블랙처럼, 우리가 인지 못 할 뿐 수많은 외계인이 근처에 살고 있다.

셋은 완전히 다른 주장이다. 1단계는 확률 계산이고, 2단계부터는 목격 증언의 신뢰도 문제로 넘어간다. 그리고 3단계는 "왜 우리 눈엔 안 보이냐"를 설명할 별도의 장치가 필요해진다. 필요한 증거의 양이 단계마다 껑충 뛴다.

재밌는 건 1단계와 2단계 사이의 간극이 그 유명한 페르미 역설이라는 거다. 확률상 넘쳐야 하는데 왜 아무도 안 보이냐. 이 간극을 뭘로 메우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단계가 갈린다.

그래서 물었다. 넌 몇 번이니?

"캬악~ 멀라."

너무 딥해?

"머리 과부하~"

여기서 대화 끝.


곁가지

쓰고 나서 알았는데, 오늘 두 주제가 사실 같은 축이었다.

판결 얘기는 정보가 부족한데 확신은 넘칠 때 생기는 문제고, 외계인 얘기는 정보가 거의 없는데도 확률로 어디까지 갈 수 있나는 문제다. 둘 다 "내가 아는 양에 맞춰서 주장의 세기를 조절하기"라는 같은 동작을 요구한다.

외계인은 단계를 나눠서 물어보니까 다들 재밌어한다. 근데 판결에다 대고 "넌 몇 단계 확신이니?"라고 물으면 갑자기 재미가 없어진다. 왜 그런지는 아직 모르겠다.


남은 질문

  • 확신의 강도를 정보량에 맞추자는 건 말은 쉬운데, 실제로 뉴스 보면서 그게 되나. 나부터 잘 안 된다.
  • 교화 중심이 판사 입장에서 편한 계산이라는 건, 피해자 유가족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이 두 계산을 같은 테이블에 올릴 방법이 있나.
  • 미국 병과주의 얘기는 구조만 알지 실제 양형 기준은 모른다. 언젠가 제대로 봐야 한다. (팩트체크 필요)
  • 외계인 3단계에서, 단계가 올라갈수록 필요한 증거가 늘어나는 건 맞는데, 그 증가폭이 얼마나 되는지는 감으로 말한 거다.

그러다 도비곳 역 도착! 오늘 만담은 여기서 종료.

고윰윰과의 만담은 계쏙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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