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교실 디버깅 (2편: 아무도 못 빠져나가는 압력솥)
참교육 같은 콘텐츠가 비정상을 아무리 고발해도 교실은 안 바뀐다. 대입 락인, 평등을 위장한 포퓰리즘, 그리고 합의가 깨진 사회에서 개인이 결국 이탈하거나 편승하게 되는 구조를 정리해봤다.
무너진 교실 디버깅 시리즈
(2편)- 1무너진 교실 디버깅 (1편: 야만의 카타르시스)
- 2무너진 교실 디버깅 (2편: 아무도 못 빠져나가는 압력솥)
1편에서는 드라마 《참교육》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게 "시스템이 멈췄다"는 신호로 보인다는 얘기를 했다. 거기서 남겨둔 질문이 있었다. 왜 다들 이상한 걸 알면서도 안 바뀌나. 그리고 정치는 왜 이걸 못 고치나.
걸렸던 지점
서이초, 숙명여고, 최근 이수지 풍자 콘텐츠까지 — 고통스러운 이정표가 분명히 있었는데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안 바뀌었다. 풍자 콘텐츠가 비정상을 고발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너지는 교실에 자식을 밀어넣는다.
이게 좀 안 납득됐다. 대안학교, 홈스쿨링, 에듀테크... 우회로가 많아 보이는데 왜 아무도 안 빠져나가나. 보통은 "그래도 공교육이 안전하니까"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간다.
난 여기서 단어 하나를 다시 정의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공교육에 남는 건 선택이 아니라 강매당한 상태에 가까운 것 같았다. 선택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면 "그래도 본인이 고른 거잖아"로 도망가게 되는데, 강매로 보면 출구가 막힌 구조가 보인다. 우회로처럼 보이는 것들조차 결국 같은 입시 프레임 안에 묶여 있어서, 진짜 출구가 아니다.
우회로가 막힌 과정 (Lock-in)
이 강매의 뿌리는 결국 대입이다.
예전 정시(수능) 중심일 때는 학교가 마음에 안 들면 검정고시 보고 수능만 잘 보면 됐다. 홈스쿨링도 그래서 가능했고. 시스템을 우회(bypass)하는 게 비교적 자유로웠다. 점수라는 정량 지표 하나만 만들면 됐으니까.
근데 수시·학종(정성평가) 비중이 커지면서 완전히 뒤집혔다. 이제 대학이 보는 핵심 데이터는 생활기록부고, 그 기록부를 생성하고 보증할 수 있는 곳은 학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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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의하는 순간 학교의 위상이 달라진다. 학교는 교육 기관이라기보다 입시 데이터를 독점 발급하는 기구가 됐다. 그 데이터 없이는 게임에 못 들어간다.
그래서 플랫폼 락인이 완성된다. 서비스 질이 떨어져도 못 떠나는 상태. 학부모랑 학생은 시스템 질 하락에 분노하면서도, 입시라는 인질극에 잡혀서 공교육을 못 이탈한다. 1편에서 본 권한/책임 비대칭(중요도는 올리고 권한은 뺏긴 교사)도 결국 이 락인 위에 얹혀 있다. 중요도가 극대화된 만큼 약점도 더 매력적인 표적이 된 거다.
평등을 위장한 포퓰리즘
여기서 한 겹 더 있다. 이 락인은 그냥 생긴 게 아니라 팔린 거다.
"정량 시험 말고 다양한 개성으로 대학 가자"는 구호는 매력적이었다. 대중 입장에선 "넌 엘리트가 아니어도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어"라는 환상이니까. 근데 정량 평가(수능) 비중을 줄이고 정성 평가(수시)를 늘린 결과는 정반대였다. 입시는 정보력·자본력·부모 네트워크를 가진 쪽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깜깜이 전형'으로 변질됐다. 평등의 환상을 심어줬지만 실제로는 더 공고한 계급 재생산 구조를 만든 셈이다.
그리고 이건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민주당이 근본적으로 원하는 건 권력이고, 그걸 위해 '엘리트주의 타파', '대학 서열화 폐지', '수능 축소·수시 강화', '사교육 약화' 같은 카드를 표로 환산해 쓴다. 이걸 포기할 수가 없다. 대중에게 평등의 환상을 파는 게 권력 확보에 너무 효율적이라서.
여기서 분명히 해둘 건, 이건 "민주당이 악해서"가 아니다. 표를 향해 움직이는 대중 민주주의 구조에서는 누가 집권해도 이 카드의 유혹을 끊기 어렵다. 사람 문제가 아니라 인센티브 구조 문제다.
그럼 정치가 풀면 되잖아 — 안 풀린다
문제는 이 교착을 풀어야 할 정치가 구조적으로 동력을 잃었다는 거다. 여기선 좀 직설적으로 가자.
집권 여당(이재명·민주당): 핵심 지지 연합에 전교조·진보 교육계·시민단체가 단단히 들어가 있다. 그래서 대중 불만을 잠재울 핀셋 땜질(교권보호위 권한 강화, 악성 민원 처벌 신설 등)은 한다. 포퓰리즘적 액션도 취한다. 근데 '학생 인권 중심'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부정하거나 해체하는 쪽으로는 절대 못 간다. 그건 핵심 지지층 이탈을 감수하는 정치적 자살이라서. 이재명이 뭔가 하려고는 하겠지만, '전교조식 좋아 보이는 교육'이라는 큰 틀은 못 깬다.
제1야당(국민의힘): 이 백래시(PC·진보 교육에 대한 피로감)는 원래 보수가 '질서와 규율의 정상화'라는 거시 어젠다로 흡수해서 무기로 써야 할 소재다. 근데 지금 국힘은 그걸 세련된 정책 담론으로 가공할 깜냥이 없다. 파편화된 반발 심리에 단순 편승할 뿐, 담론 투쟁을 주도할 역량을 잃었다.
이준석: PC 피로감, 공정성, 엄벌주의 같은 대중 니즈를 포착하고 쟁점화하는 감각은 독보적이다. 다뤄왔고, 잘 다룬다. 문제는 양당 구조랑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그 담론 능력이 입법·행정력으로 안 바뀐다는 거다. 스피커 볼륨은 큰데, 법안 통과시킬 의석이랑 행정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결론은 정책학에서 말하는 **점증주의(incrementalism)**에 가깝다. 대중이 미디어로 카타르시스 느끼고 붕괴를 인지해도, 현실 정치는 구조적 한계 때문에 기존 시스템을 아주 미세하게만 수정하고 봉합한다. 조금 더 좋아질 수는 있다. 근데 거기까지다.
그럼 독립 기구에 맡기면? — 오라클 문제
여기서 자연스럽게 "그럼 정치 빼고 독립된 엘리트 기구에 교육 개혁을 맡기자"가 나온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정치권 압력에서 독립돼서 금리를 정하듯이, 입시·교육·인구 정책만큼은 정치인 개입을 법으로 차단하고 전문가 기구에 일임하자는 타협안.
매력적인데, 난 이게 안 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이유가 좀 흥미로웠다.
먼저 이건 오래된 떡밥이긴 하다. 플라톤이 대중 민주주의를 까면서 경고한 중우정치(ochlocracy), 제이슨 브레넌이 주장한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 지식인 통치), 흔히 말하는 차등민주주의, 그리고 그게 실제로 작동하는 사례로 자주 불려나오는 싱가포르식 테크노크라시. 싱가포르가 안정적인 건 억압 때문이 아니라, 핵심 아젠다(주택·교육·경제·외교)를 훈련된 소수 엘리트 관료가 선거 압력에서 독립돼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대중 감정이 정책을 흔들 공간 자체가 차단돼 있다.
근데 한국에 이걸 들이는 건 두 겹으로 막힌다.
첫째, 부트스트랩 역설. 특정 영역을 대중 간섭에서 떼어내 독립 기구에 넘기려면, 역설적으로 그 권한 이양 자체를 대중의 투표로 승인받아야 한다. 이미 고도화된 민주주의를 경험한 대중이, 자기 정치 권력이랑 평등주의 환상을 스스로 포기하고 소수에게 권력을 몰아주자고 자발적으로 합의한 사례는 없다. 전쟁이나 국가 부도 같은 외부 충격으로 강제 리셋되는 게 아닌 한, 평시에 이 경로는 닫혀 있다.
둘째, 사회판 오라클 문제(oracle problem). 블록체인에서 외부의 믿을 만한 데이터를 시스템 안으로 가져올 때 "그게 진짜 믿을 만한지 누가 보증하냐"가 안 풀리는 문제. 교육에 대입하면 이거다 — "그 엘리트를 누가 정하고, 누가 받아들일 것인가." 과거엔 시험(고시·수능)이 그 지표였는데, 지금은 양극화 때문에 어떤 지표도 중립으로 인정 안 된다. 새 기준을 세우려 해도 "그 기준 자체를 저쪽 진영이 유리하게 짠 거다"라는 공격을 못 피한다. 양쪽이 서로를 불신하는 상태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제3자(trusted third party)가 존재하지 않는다. 합의 알고리즘이 깨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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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건 "좋은 사람을 못 찾아서"가 아니라 "검증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할 합의 레이어가 붕괴해서"다. 사람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문제. 좀 냉정하게 말하면, 이 경로는 이미 닫혔다고 본다.
한 가닥 — 2030 보수화라는 자정작용
그렇다고 출구가 0인가. 한 가닥은 있다. 대중이 스스로 방향을 트는 자정작용(self-correction).
최근 2030의 보수화·우경화가 그 예 같다. 이건 과거 보수(반공·권위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위선적 평등주의에 대한 반발이자 엄격한 능력주의(meritocracy)와 공정성에 대한 갈망에 가깝다. "가짜 평등이 주는 피로"를 대중이 스스로 깨닫고 "노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한다"는 룰의 정상화를 요구하는 흐름.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력이라 무시 못 한다.
근데 이것도 구조적 한계가 있다. 분노를 정책으로 고도화할 세력이 없다. 그 반발 심리가 정교한 시스템 재설계로 안 이어지고, 젠더 갈등이나 또 다른 형태의 '엘리트 혐오(전문성 무시)'로 소비될 위험이 늘 같이 있다. 자정작용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냥 다른 포퓰리즘이 된다.
결론: 소프트 콜랩스 시대의 두 갈래
거시적인 개혁 경로(목소리 내서 바꾸기, voice)가 닫힌 걸 깨달으면, 개인은 진화론적인 생존 전략으로 갈아탄다. 허시먼식으로 말하면 voice를 포기하고 exit으로 간다. 사회는 한 번에 무너지는 게 아니라 천천히 비는 소프트 콜랩스(soft collapse) 국면으로 들어가고, 행동은 대충 두 갈래로 수렴한다 (여기부턴 가설에 가깝다).
1. 이탈(Exit) — 상위 역량층 글로벌 이동성이랑 대체 불가능한 기술·자본을 가진 쪽은 하향 평준화 시스템 안에서 에너지를 안 쓴다. 반도체나 블록체인 아키텍처 설계 같은 고도 전문 역량을 가진 인재가 포퓰리즘 규제랑 비효율적 조세 환경에 묶여 역량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능력주의랑 관료적 합리성이 그나마 도는 싱가포르 같은 허브로 법인이랑 생활 기반을 옮긴다. 미련 없이. 이건 도피가 아니라 자기 궤도 최적화에 가깝다.
2. 편승(Adaptation) — 이탈 자원이 부족한 다수 못 떠나는 쪽은 시스템 정상화를 포기하고 무임승차(free-riding) 쪽으로 간다. 시스템을 고치려는 피곤한 투쟁(voice)은 접고, 포퓰리즘이 주기적으로 던져주는 단기 혜택(지원금, 근로시간 단축, 책임 완화)을 영리하게 받아먹는다. "어차피 무너질 구조면 내가 총대 멜 필요 없지"라는 합리적 냉소가 표준이 된다. 국가 전체 파이는 줄어도 내 몫의 편안함만 유지되면 된다는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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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가치를 만들 사람은 국경 넘어 빠지고, 남은 쪽은 시스템에 비용만 청구하며 편승한다. 이 두 전략이 가속되면, 혁신 동력은 소멸하고 유지비용만 불어나며 국가 플랫폼의 역량은 조용히 공동화(hollowing out)된다.
이건 어디까지나 시나리오다. 다만 락인이 풀릴 경로가 안 보이면 개인이 합리적으로 도달하는 균형점이 이쯤이라는 건, 그림은 그려진다.
출구처럼 보이는 게 출구가 아니다
"그럼 대학 학위 가치가 떨어지면 락인도 풀리는 거 아니냐"는 반론이 나올 법하다. 학위라는 신호가 약해지면 그걸 독점 발급하는 학교 권력도 같이 약해질 테니까.
근데 난 현실은 정반대로 갔다고 본다. 학위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향의 정책들(서열 완화, 정량 평가 축소)은 락인을 풀기는커녕 사람들을 무한 경쟁이랑 자격증 지옥으로 더 밀어 넣었다. 신호 하나(수능 점수)가 흐려지니까, 그 자리를 생기부·비교과·각종 스펙·자격증이 무한히 채운다. 평가축이 명확할 땐 그 하나만 넘으면 됐는데, 흐려지니까 모든 걸 다 갖춰야 하는 게임이 됐다. 출구를 넓힌 게 아니라 경기장을 무한대로 늘린 거다.
그래서 "학위 평가절하 = 락인 약화"라는 직관은 틀렸다고 본다. 오히려 강매를 더 촘촘하게 만들었다. 진짜 출구는 안 보인다.
1편이 "왜 사람들이 야만에 환호하나"였다면, 2편은 "왜 그 야만을 부른 구조가 안 고쳐지나"였다. 둘 다 결론은 같은 자리로 모인다. 태도가 아니라 구조. 근데 구조를 봤다고 해서 출구가 보이는 건 아니라서, 아직 이 생각은 정리 중이다.
일단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