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아이돌은 서사가 없어서 안 된다던데
출근 준비하다 붙은 아침 만담. AI가 아이돌 산업에 들어오면 양산형이 되냐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서사가 뭔지, 그게 인간 고유의 것인지까지 굴러갔다.
들어가기 전에
아래 나오는 고윰윰은 재미를 위해 겁나 단호박으로 각색된 픽션입니다.
실제로는 짧은 문답 몇 개를 던졌을 뿐이고, 대부분은 그걸 받아서 내가 혼자 반박하고 혼자 고쳐나간 과정이다. 근데 그걸 있는 그대로 쓰면 그냥 독백이라 읽는 맛이 없다. 그래서 내 안에서 굴러간 반대편 논리를 전부 고윰윰 입에 몰아줬다.
실제 인물의 실제 톤이 아니라 논증 상대역이라고 보면 된다. 저렇게 딱딱 자르고 말하는 사람 아니다.
계기
아침에 출근 준비하다가 만담이 붙었다.
요새 우리 집 대화 지분의 절반은 리센느다. 저번에도 리센느 영상 보다가 의대 쏠림까지 굴러간 적 있는데, 오늘은 방향이 좀 달랐다.
내가 던진 건 이거였다. 아이돌 산업에 AI 들어오면 결국 다 양산형 되는 거 아니냐. 얼굴도 목소리도 곡도 다 뽑아낼 수 있는데.
고윰윰이 바로 잘랐다.
"AI는 서사를 못 만들어. 그리고 아이돌은 서사가 필수야. 그러니까 안 돼."
깔끔한 논증이다. 대전제, 소전제, 결론. 근데 난 여기서 동의가 안 됐다. 어디가 걸리는지는 바로 못 짚겠는데, 설명은 되는데 납득이 안 되는 그 느낌. 난 이 감각을 제일 중요한 신호로 본다.
그래서 머리 말리면서 계속 물고 늘어졌다. 아래는 그 순서 그대로다.
1. 아이돌한테 서사가 진짜 필수인가
리센느가 서사형이라는 건 인정한다. 소상공인 아이돌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올라온 궤적 자체가 콘텐츠고, 나도 그 궤적 때문에 빠진 게 맞다. 원이가 카리나급 외모로 추앙받으면서도 털털한 거, 미나미가 일본에서 건너와서 고생하면서도 사려 깊은 거, 리브의 안 지치는 에너지, 메이의 쫑알거림, 까엉이. 이거 다 아는 순간 그냥 영상이 다르게 보인다. 이게 서사다.
근데 그건 서사가 강력하다는 증거지, 서사가 필수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래서 반례를 던졌다. 장원영, 카리나, 설윤.
미리 말해두는데 이 사람들한테 서사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 있다. 내가 물어본 건 다른 거다. 대중이 이 사람들한테 들어온 경로가 서사였냐는 것. 대부분은 아니라고 본다. 화면에 뜬 순간의 압도적인 무언가가 먼저고, 서사는 그다음에 붙는다. 순서가 반대다.
그러니까 서사는 유지 조건에 가깝다. 붙잡아두는 힘은 확실히 세다. 근데 진입 조건은 아니다.
그럼 이렇게 된다. 이쁘고, 노래 잘하고, 사교성 좋고, 프로듀싱까지 전부 AI로 최적화한 가상 아이돌이 진입 조건을 못 넘을 이유가 있나? 대중이 뭘 좋아하는지 맞추는 건 정확히 이런 시스템이 제일 잘하는 일인데.
고윰윰은 "그건 껍데기고 오래 못 간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 근데 그건 필수 조건 주장이 아니라 지속성 주장이다. 명제가 슬쩍 바뀐 거다.
2. 애초에 실존하는지 아닌지 구분이 되나
여기서 내가 더 궁금했던 건 이쪽이다.
대다수 대중은 아이돌을 화면으로만 소비한다. 콘서트 가는 사람도 전체 소비자 중엔 소수다. 나만 해도 리센느를 유튜브랑 인스타로만 본다. 실물을 본 적이 없다.
그럼 화면 너머의 존재가 실제로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가, 내 소비 경험에서 얼마나 차이를 만드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리센느는 편집된 영상 속의 리센느다. 그게 실존 인물에서 나온 파편이라는 건 알지만, 그 사실을 내가 검증한 적은 없다. 그냥 그렇다고 알고 있는 거다.
그리고 이미 답이 반쯤 나와 있기도 하다. 버추얼 아이돌이 돌아가고 있고, 미쿠는 십수 년째 굴러간다. 실존이 소비의 필요조건이었으면 이 시장 자체가 안 열렸다.
고윰윰 반박: "그건 처음부터 가상인 걸 알고 소비하는 거고, 인간인 척하는 거랑은 다르다."
이건 맞는 지적이라고 본다. 근데 그러면 조건이 '실존'이 아니라 '속이지 않음'으로 바뀐다. 그것도 다른 얘기다.
3. 서사가 삶에서 나온다면, 삶은 뭔데
여기서 대화가 제일 재밌어졌다.
고윰윰 논리의 뿌리는 "AI는 살아있지 않으니까 겪은 게 없고, 겪은 게 없으니까 서사가 없다"다. 그럼 살아있다는 게 뭔지를 정해야 한다.
그래서 사고실험을 하나 던졌다.
양자내성 데이터 장치 같은 걸 만든다고 치자. 인간 뇌처럼 휘발성 데이터를 갖게 하는 거다. 저장이 완벽하지 않고, 시간 지나면 흐려지고, 잊는다. 그리고 휴머노이드랑 안드로이드가 갈리듯 물리적 몸을 주고, 생존 욕구를 심는다. 배터리, 부품 노후화, 손상, 수리 불가.
이 조건에서 얘가 살아간다. 뭔가를 하려다 실패하고, 잊고, 망가지고, 그럼에도 계속 뭘 한다.
이 궤적은 서사인가 아닌가?
고윰윰 답: "그건 시뮬레이션된 서사지 진짜가 아니야."
근데 그렇게 답하는 순간, 서사의 조건이 '겪었냐'에서 '탄소로 만들어졌냐'로 슬쩍 옮겨간다. 그건 반박이 아니라 정의를 바꾼 거다. 나는 이 지점이 이 대화 전체에서 제일 중요한 지점이었다고 본다.
물론 나도 여기서 확신이 있진 않다. 되짚어보면 결국 이 질문이다.
서사는 인간 고유의 것인가, 아니면 특정 조건이 갖춰지면 발생하는 건가.
전자면 고윰윰이 맞다. 후자면 조건을 갖추는 건 시간 문제다.
내가 잠정적으로 잡은 조건은 되돌릴 수 없음이다. 잊은 걸 복구 못 하고, 잃은 시간을 못 되감고, 실패한 선택을 롤백 못 하는 것. 세이브 파일 있는 게임에서 캐릭터 죽는 건 사건이 아니다. 다시 로드하면 되니까.
그리고 AI한테 없는 건 '경험'이 아니다. 로그는 오히려 인간보다 정확하다. 없는 건 되돌릴 수 없음 쪽이다. 근데 이건 못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 이유가 없어서 안 만드는 것에 가깝다. (가설이다. 검증된 얘기 아님)
4. 그럼 프로듀싱은? 여긴 얘기가 훨씬 단순하다
서사 논쟁은 계속 철학으로 빠지는데, 산업 쪽으로 내려오면 오히려 계산이 명확해진다. 두 케이스로 갈렸다.
케이스 A — 프로듀서가 추상화된 경우
하츠네 미쿠.
미쿠는 소속사가 없다. 기획 총괄도 없고, 정해진 서사도 없다. 목소리 엔진 하나 던져놨더니 집단지성이 곡을 쓰고, 캐릭터를 세우고, 알아서 서사를 붙였다. 프로듀서라는 자리가 사람이 아니라 추상적인 무언가로 대체된 건데도 아이돌로서의 가치가 발생했다.
이게 흥미로운 이유는, 생산자 쪽에서 서사를 아예 공급 안 했는데 서사가 생겼다는 거다. 오히려 공급을 안 했기 때문에 각자 자기 걸 붙일 수 있었다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미쿠는 아이돌이 아니라 악기다"라고 하면 반박이 되는데, 그렇게 계속 좁히다 보면 "인간이 하는 게 아이돌이다"에 도달해서 논쟁이 순환한다.
케이스 B — 백엔드만 AI로 갈고 인간 아이돌은 출력단으로 남기는 경우
이쪽이 더 현실적이고 아마 더 빨리 온다.
작곡, 편곡, 안무 설계, 콘셉트 기획, 트렌드 분석, 콘텐츠 편성, 숏폼 편집, 타겟 마케팅. 엔터 회사 안의 요소랑 객체를 전부 AI로 대체하고,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인간 출력단만 남긴다.
이 회사, 경쟁력 있나?
내 주장은 이거였다. 어중간한 중소 듣보 기획사보다, 100% AI로 대체한 프로듀싱 회사가 이미 더 잘할 수도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중소 기획사의 진짜 병목은 자본보다 판단 횟수다. 곡을 몇 개 검토했는지, 콘셉트 안을 몇 개 버렸는지, 반응 데이터를 몇 사이클 돌렸는지. 대형 기획사와의 격차 상당 부분이 여기서 나온다고 본다. 그리고 AI는 정확히 이 횟수를 늘리는 도구다. 감으로 세 개 만들던 걸 삼백 개 뽑아서 거른다.
여기서 고윰윰도 크게 반박은 안 했다. 대신 "그래도 마지막에 고르는 건 사람이어야 한다"는 쪽이었는데, 그건 나도 동의한다. 다만 그 사람이 기획사 안에 있어야 하는지는 별개 문제다.
곁가지 하나
쓰다 보니 하나 더 걸리는 게 있었는데, 이건 대화에서 나온 게 아니라 정리하다가 붙은 거라 짧게만 남긴다.
인간 아이돌은 사고를 친다. 스캔들 나고, 컨디션 무너지고, 팀 깨진다. 회사 입장에선 리스크인데, 팬 입장에선 그게 몰입의 담보물일 수도 있다. 실패할 수 있어야 성공이 사건이 되니까.
완벽하게 설계된 AI 아이돌한테 없는 게 서사가 아니라 이쪽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근데 이건 아직 큰 축이라고 보진 않는다. 미쿠가 반례에 가깝고. 일단 적어만 둔다.
남은 질문
- 서사가 인간 고유의 것인지, 조건이 갖춰지면 발생하는 건지. 이게 이 대화의 진짜 쟁점이었는데 결국 안 풀렸다.
- 대중이 실존 여부를 검증할 수 없다면, '속이지 않음'이 조건이 되나. 그럼 처음부터 AI라고 밝힌 AI 아이돌은 통과인가.
- 케이스 B가 표준이 되면 인간 아이돌의 역할은 뭐로 남나. 이건 구조 얘기 넘어서 사람이 다치는 지점이라 따로 봐야 한다.
- 미쿠 모델이 미쿠 말고 또 성공한 사례가 있나. 하나뿐이면 모델이 아니라 사고일 수도 있다. (팩트체크 필요)
출근 준비하다 시작해서 지하철 탈 때까지 이어졌다. 양쪽 다 내가 맡았는데도 아직 어느 쪽도 안 접었다.
근데 이 상태가 나쁘지 않다. 오늘 아침에 깔끔하게 정리됐으면 저녁에 할 얘기가 없었을 거다.
내일 아침에 또 붙을 것 같은데, 그때는 고윰윰이 진짜로 단호박이 될지도 모른다. 일단 여기까지 덤프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