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우스에서 센과 치히로를 찾았다
오디세이의 돼지 변신 쇼츠에서 센과 치히로를 떠올렸다. 키르케 섬과 유바바의 목욕탕, 콩쥐팥쥐와 신데렐라를 지나 설화는 인간의 경험에 맞춘 테트리스 블록 아닐까까지 굴러갔다.
나는 아직 《오디세이》를 보지 않았다.
다만 남자들이 돼지로 변하는 장면이 담긴 쇼츠를 봤다. 키르케가 음식을 내놓고, 남자들은 먹고, 사람의 몸이 돼지로 바뀐다.
보자마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생각났다.
돼지가 되기 전의 장소
센의 부모도 낯선 곳의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된다. 둘 다 돼지가 된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흔한 변신 장면일 수 있다.
근데 내가 걸린 건 그 앞뒤였다.
두 장면 모두 사람들이 낯선 세계의 음식과 환대에 먼저 몸을 맡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인간의 자리를 잃는다.
《센과 치히로》의 목욕탕은 그냥 목욕탕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당시 인터뷰에서 지금의 일본을 그리기에 가장 알맞은 소재로 풍속영업을 언급했다. 유바바의 목욕탕에는 이름을 빼앗고, 숙식을 제공하고, 손님에게 봉사하게 하고, 밖으로 쉽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구조가 있다. 그래서 이곳을 유곽의 그림자와 함께 읽는 건 단순한 도시전설만은 아닌 것 같다. 당시 인터뷰를 인용한 정리
물론 영화 전체를 성매매 은유 하나로 밀어 넣자는 말은 아니다. 신들이 목욕하러 오는 판타지 목욕탕이면서, 동시에 풍속산업의 질감이 겹쳐 있는 장소라는 쪽에 가깝다.
키르케의 섬도 비슷하게 보였다.
그 섬이 역사적으로 실제 성매매 업소였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전쟁을 마치고 바다를 떠도는 남자들이 도착해서 음식과 술, 성적 유혹과 휴식을 제공받고 오래 머무는 장소다. 부하들은 돼지가 되고, 오디세우스도 키르케와 관계를 맺은 뒤 일 년을 그 섬에서 보낸다. 키르케 이야기 정리
외형은 다르지만 둘 다 인간을 붙들어 두는 유흥과 환대의 공간으로 읽힌다.
센은 근무자고 오디세우스는 여행자다
근데 둘의 위치는 완전히 다르다.
센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이름을 잃고, 노동 계약을 맺고, 그 세계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기 몫을 해내야 한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공간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공간을 굴러가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디세우스는 여행자다. 키르케 섬에 도착한 외부인이고, 붙들리지만 결국 떠나는 사람이다. 센이 그 공간 안에서 자기 이름을 되찾는 쪽이라면, 오디세우스는 그 공간을 통과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쪽이다.
같은 유흥의 공간인데 한 사람은 근무자고, 한 사람은 여행자다.
이렇게 놓고 보니 돼지 장면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센의 부모는 소비자로 들어왔다가 소비되는 존재가 된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낯선 환대에 몸을 맡겼다가 짐승이 된다. 둘 다 욕망의 벌이라고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욕망 자체보다, 욕망을 받아주는 공간이 사람의 이름과 몸과 귀환 의지를 어떻게 바꾸는지가 더 궁금했다.
이야기는 왜 비슷한 블록을 꺼낼까
여기서 갑자기 다른 설화들이 생각났다.
토끼는 용궁에 갔다가 간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고, 꾀를 써서 육지로 돌아온다. 바리공주는 저승으로 가서 약을 구해 오고, 돌아와 부모를 살린다.
오디세우스와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도 낯선 세계에 들어가고, 그곳의 규칙에 붙잡히고, 무언가를 치른 뒤 돌아온다는 모양은 반복된다.
이 정도라면 인간이 이동과 귀환을 설명할 때 흔히 만드는 구조라고 넘길 수도 있다.
근데 콩쥐팥쥐와 신데렐라까지 가면 조금 더 이상해진다.
지구 반대편의 같은 신발
콩쥐팥쥐와 신데렐라는 단순히 착한 주인공이 고생 끝에 잘된다는 수준으로 닮은 게 아니다.
둘 다 어머니가 사라진 자리에 계모와 의붓자매가 들어온다. 주인공은 집 안에서 가장 힘든 노동을 떠맡고, 혼자서는 끝낼 수 없는 과제를 받는다. 그때 동물이나 초자연적인 존재가 나타나 주인공을 돕는다.
대표적으로 전해지는 콩쥐팥쥐 줄거리에서 콩쥐는 선녀가 준 옷과 신발을 신고 잔치에 간다. 가는 길에 냇가에서 신발 한 짝을 잃고, 원님 또는 감사가 그 신발을 발견한다. 신발의 주인을 찾은 끝에 콩쥐와 혼인한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와 거의 같은 기능이다. 콩쥐팥쥐 설화의 줄거리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착한 딸 정도만 같다면 흔한 가족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불가능한 노동, 초자연적 조력자, 잔치, 잃어버린 신발, 신발을 이용한 신원 확인, 혼인에 의한 신분 이동까지 순서대로 겹친다.
지구 반대편에서 전해진 두 이야기라고 넘기기에는 유사도가 너무 높다. 실제로 설화 연구에서도 콩쥐팥쥐는 국제적인 신데렐라형 이야기인 ATU 510A와 함께 비교된다. 관련 비교 연구
물론 완전히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신데렐라는 보통 혼인에서 끝나지만, 콩쥐팥쥐는 그 뒤에도 살해와 재생, 복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앞부분에는 세계적으로 반복되는 블록이 있고, 뒷부분에는 한국에서 더 강하게 자란 블록이 붙어 있는 셈이다.
그럼 둘은 정말 서로 모르고 비슷해진 걸까. 아니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야기가 사람과 함께 이동하면서 양쪽에 남은 걸까.
지금 단계에서는 나도 모르겠다. 오히려 어느 쪽이든 이상하다. 독립적으로 생겼다면 인간이 비슷한 서사를 조립한다는 뜻이고, 전파된 것이라면 인간이 수많은 이야기 중 이 구조를 유독 오래 보존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이걸 단순히 수렴진화라고 부르기에도, 하나의 원본이 복제됐다고 부르기에도 아직 이르다.
신화와 설화는 테트리스 블록인가
여기서 든 건 그냥 개인적인 궁금증이다.
신화와 설화는 인간 뇌에 맞춰서, 이미 일어난 삶을 설명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테트리스 블록 같은 것 아닐까.
삶은 훨씬 지저분하다. 떠났다고 해서 꼭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유혹을 이겨냈다고 해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노동한다고 이름을 되찾는 것도 아니다.
근데 이야기는 그 지저분한 경험을 몇 개의 블록으로 잘라낸다.
- 떠남
- 낯선 공간
- 먹으면 안 되는 것
- 이름을 잃는 일
- 노동
- 변신
- 속임수
- 귀환
그리고 “이건 떠남이었고, 이건 시험이었고, 이건 귀환이었다”라고 말해 준다.
물론 이건 가설이다. 신화와 설화가 실제 역사나 전승과 무관하게 머릿속에서만 조립됐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오래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이 블록들이 남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우리는 왜 처음 보는 이야기에서도, 이미 알고 있던 블록을 발견한 것처럼 반응할까.
PS. 원이의 거제편
라이너 아저씨의 리센느 안원잘부 리뷰에서 원이를 오디세우스에 비유한 대목이 떠올랐다. 리뷰 영상
라이너 아저씨는 이 구조를 노스토스(Nostos), 귀향이라고 불렀다. 거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친 원이가 꿈을 위해 서울로 간다. 아이돌이 된 뒤에도 사투리, 낯선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습관, 맨손으로 미끼를 꿰는 손에는 거제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떠났던 사람이 돌아왔을 때 고향은 예전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돌아온 사람이 이미 달라졌기 때문이다. 라이너 아저씨는 이 지점에서 오디세이아의 귀향 서사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떤 사람인가”라는 정체성의 질문을 꺼냈다.
영상 앞부분에서 짚은 대목도 이어진다. 원이가 가게에 들어가 “이모, 저 덕연이 딸인데요”라고 말하자 사장님이 반죽 묻은 손으로 나와 반겨준다. 라이너 아저씨는 이 장면을 영상의 심장이라고 봤다. 기획된 아이돌 이미지 사이로 연출하기 어려운 실제 삶이 잡혔고,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돌 콘텐츠를 ‘영화 같다’고 느꼈다는 해석이다. 해당 분석
원이의 거제편이 사랑받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오래된 귀향 설화의 구조와 연출할 수 없는 삶의 순간이 한 영상 안에서 만났다는 설명은 꽤 설득력 있게 들렸다.
이 글을 정리하다 보니 그 말이 다시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