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센느 보다가 의대 쏠림까지 굴러왔다
아이돌 산업 구조를 뜯어보다가 '의대 쏠림 = 망국병' 프레임에 걸렸다. 도덕 필터를 끄고 자원 흐름만 보면 다르게 보이는 게 있다.
계기
요새 한국 대세는 리센느(RESCENE)다.
'소상공인 아이돌'로 시작한 팀이다. 작은 기획사, 빠듯한 물량, 알아서 굴러가야 하는 홍보. 그 상태로 시작해서 지금은 한국 엔터계를 지배하는 대세 그룹이 됐다.
먼저 하나 밝혀두고 시작한다. 이 글은 리센느나 아이돌 산업을 욕하려고 쓰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래서 내가 얘네를 왜 좋아하는지부터 적는다.
- 원이 — 카리나급 외모로 추앙받으면서도 털털하고 솔직하다. 반전 매력이 있는 리더.
- 미나미 — 일본에서 아이돌 하겠다고 한국까지 건너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사려 깊고 배려심을 잃지 않는다. 볼매다.
- 리브 — 지치지 않는 에너지에 밉지 않은 의욕. 보는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든다.
- 메이 — 오디오를 24시간 채워주는 귀여운 쫑알거림인데, 그 안에 사려 깊은 말이 숨어 있다.
- 까엉이 — 그냥 귀엽다.
한국 아이돌한테 별 관심 없던 나도 요새 리센느 영상에 빠졌다. 다른 사람들도 대충 비슷한 경로로 들어왔을 거라고 본다.
그렇게 계속 보다 보니, 어느 순간 그룹보다 그 뒤에 있는 산업 구조가 더 궁금해졌다. 기획사가 그룹 하나를 런칭할 때 뭘 통제하고 뭘 포기하는가. 어디가 병목인가.
그러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레거시 하나가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의대 쏠림 얘기다.
1. "망국병"이라는 이름이 붙은 시점부터 논의가 닫힌다
한국에서 거의 합의처럼 굳어진 문장이 있다.
"공부 제일 잘하는 애들이 공대 안 가고 전부 의대로 쏠려서 국가 경쟁력이 무너진다."
이 문장 자체는 반박하기 어렵다. 반박하기 어려운 이유가 근거가 튼튼해서인지, 아니면 반박하는 순간 도덕적으로 이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인지는 좀 다른 문제인데, 보통 그 둘이 구분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미 쓰이고 있는 단어들을 다시 보자. 쏠림은 자원 배분의 실패를 뜻하는 단어다. 두뇌 유출은 나간 자원이 아무 데도 안 쓰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프레임 자체가 이미 결론을 담고 있다. "이 자원은 낭비되었다"가 전제로 깔려 있는 거다.
난 여기서 동의가 안 됐다. 자원이 한 지점에 집중되면 낭비만 발생하나? 집중된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출력물은 왜 계산에 안 들어가지?
2. 기획사 입장에서 가장 비싼 변수
관찰부터. 아이돌 그룹을 런칭할 때 기획사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와 없는 변수가 갈린다.
- 노래, 안무, 콘셉트, 프로듀싱 → 돈과 시간으로 해결되는 영역
- 무대 장악력, 팬덤 반응 → 확률적이지만 트레이닝으로 분산을 줄일 수 있는 영역
- 비주얼 → 타고난 값에 가깝고, 후천적으로 건드리면 리스크가 큰 영역
세 번째가 문제다. 후천적으로 손을 대려는 순간 의료적 부작용, 회복 기간, 결과물의 편차가 전부 불확실성으로 들어온다. 데뷔 일정이 잡힌 상태에서 이건 꽤 무거운 연산이다.
미리 못 박아두자면, 이건 산업 전체의 평균적인 리스크 구조에 대한 얘기지 특정 그룹이나 특정 사람 얘기가 아니다. 개인이 뭘 했는지는 내가 알 수 있는 정보도 아니고, 알 필요도 없는 정보다. 여기서 보려는 건 기획사라는 의사결정 주체가 어떤 변수 앞에서 어떤 계산을 하느냐다.
여기서부터는 해석이다. 한국 기획사들은 이 연산을 다른 나라보다 싸게 처리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강남이라는 좁은 클러스터 안에, 기대 수익을 좇아 몰려든 상위권 인력들이 서로 경쟁하며 만든 고밀도 미용의료 생태계가 이미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시술 단가, 회복 프로토콜, 실패 시 리커버리 경로까지 사실상 표준화되어 있다.
즉 리스크가 사라진 게 아니라, 리스크의 분산이 줄어든 인프라가 존재하는 거다. 시스템 관점에서 이건 꽤 큰 차이다. 기대값이 같아도 분산이 크면 일정을 못 잡는다.
가설: 이 인프라는 K-pop이라는 수출 산업의 백엔드 중 하나로 이미 작동하고 있다. 다른 나라가 단기간에 복제하기 어려운 종류의 자산이다. (정확히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수치로 잡기 어렵다 — 팩트체크 필요)
'그들이 공대에 갔더라면' 식의 반사실 논쟁은 여기서 별로 쓸모가 없다. 안 간 세계선의 GDP는 아무도 모른다. 관측 가능한 건 간 세계선에서 뭐가 만들어졌는지뿐이다.
3. 왜 이 연결은 주류 담론에 안 올라올까
이게 더 흥미로웠다. 자원의 흐름과 결과물만 놓고 보면 그렇게 난해한 인과도 아닌데, 언론이나 경제 칼럼에서 이걸 메인으로 다루는 걸 거의 못 봤다.
이유는 구조적이라고 본다. 이 연결을 말하는 순간 두 개의 비용이 동시에 발생한다.
- K-pop이 '공장형 외모지상주의'라는 프레임에 갇힌다. 산업을 칭찬하려다 산업을 욕하는 결과가 된다.
- '의대 쏠림 = 망국병'이라는 굳은 합의에 대해 악마의 변호인 포지션을 서야 한다.
그러니까 이 명제는 참/거짓이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손해가 확정적이라서 유통이 안 되는 거다. 이건 개인의 지적 게으름 문제가 아니라 담론 시장의 인센티브 구조 문제다.
4. 케건을 꺼내보면
이 인지적 장벽에 대해 AI랑 핑퐁하다가 로버트 케건(Robert Kegan)의 성인 발달 이론이 나왔다.
케건은 성인의 의식 발달을 단계로 나눈다. 대부분은 3단계(주변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상태)나 4단계(자기만의 확고한 가치체계를 세운 상태)에 머문다고 본다. 4단계는 꽤 성숙한 상태지만, 자기 체계 자체를 대상화하진 못한다.
5단계(자기변형적 지성, Self-Transforming Mind)에서 달라지는 건 하나다. 자기가 믿는 체계도 하나의 불완전한 모델로 취급할 수 있게 된다. 선악이나 옳고 그름의 이분법을 넘어서, 서로 모순되는 시스템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창발(emergence)을 그냥 보는 게 가능해진다는 거다.
의대 쏠림을 '국가적 손실'이라는 도덕 필터로만 보면 안 보이던 게, 필터를 끄면 이렇게 보인다.
자원의 국소적 최적화가 만들어낸, 고성능 비표준 인프라.
여기서 짚어둘 건, 이 관점이 "그러니까 의대 쏠림은 좋은 것"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반대편 도덕 판단을 다시 붙이는 거고, 필터를 끈 게 아니라 필터를 갈아 끼운 거다. 내가 말하려는 건 판단을 잠시 유보한 상태에서만 보이는 궤적이 있다는 쪽에 가깝다.
5. 아키텍트의 렌즈가 훈련 도구일 수 있다는 가설
여기까지 오니 가설이 하나 섰다.
컴퓨터 공학을 하고 시스템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일 자체가, 이 5단계식 시선에 접근하는 꽤 괜찮은 트레이닝일 수 있다.
시스템을 설계할 때는 특정 모듈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도덕성을 부여할 틈이 없다. 하는 일이 이런 거다.
- 자원의 input과 output을 계산한다
- 노드 간 데드락을 피한다
- 독립적으로 짜인 로직들이 얽혀서 만드는 사이드 이펙트를 매일 들여다본다
- 의도한 적 없는데 발생하는 창발적 동작을 버그가 아니라 '동작'으로 먼저 인정하고 시작한다
마지막 항목이 핵심 같다. 시스템에서 예상 못 한 동작이 나오면, 일단 "이게 왜 나왔는지"를 재현하는 게 먼저다. "이건 나오면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 습관이 몇 년 쌓이면, 사회 현상을 볼 때도 "이건 있으면 안 되는 현상"이라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다.
물론 반대 위험도 있다. 모든 걸 구조로만 환원하면 그 시스템 안에서 실제로 다치는 사람이 안 보인다. 아키텍트의 렌즈는 관찰에는 강한데 책임 배분에는 약하다. 능력과 책임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얘기를, 이 경우엔 나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는 것 같다.
남은 질문
- 강남 미용의료 클러스터가 K-pop 비주얼 리스크를 실제로 얼마나 흡수하고 있는지, 수치로 잡을 방법이 있나? 지금은 정황뿐이다.
- 이 인프라는 얼마나 지속 가능한가. 의료 수요가 다른 데로 이동하면 같이 흔들리는 구조인가.
- 도덕 필터를 끄고 보는 시선은 언제 유용하고 언제 위험한가. 이 경계선을 아직 못 그었다.
리센느 영상 하나 보다가 의식 발달 단계까지 굴러왔다. 아직 정리됐다고 보진 않는다. 일단 여기까지 덤프해둔다.